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미 전쟁 (문단 편집) === 랭커스터 왕조의 성립 (1399) === [[백년전쟁]](1337~1453) 중인 1370년쯤에 잉글랜드를 잘 다스리던 군주인 [[에드워드 3세]]는 나이가 들어서 국정을 운영하기가 버거워지자 살아남은 아들 중 3남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실질적으로 [[섭정]]을 맡겼다. 곤트의 존이 후계자였다면 괜찮은 계승으로 이어졌겠지만, 문제는 후계자가 따로 있었다. 후계자는 바로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 하지만 흑태자 에드워드는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으로 보였고, 유력한 차기 후력자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였는데 그 당시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곤트의 존은 처음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몇번의 부진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왔고, 슬슬 정전협정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지휘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의 섭정 활동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흑태자가 먼저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마저 사망하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곤트의 존은 정식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곤트의 존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인두세]]를 부과했고, 이로 인해 가난한 평민들에게 상당히 높은 금액이 부과되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와트 타일러의 난]]). 어찌어찌해서 농민 봉기는 진압했지만, 잉글랜드에서 '곤트의 존'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참고로 와트 타일러의 난 때 곤트의 존은 프랑스에 있었는데 화가 난 시위대가 존의 거주지였던 성을 불태웠다.] 그리고 존은 얼마 뒤에 아내의 친정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카스티야]] 왕가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그곳에서 왕을 해보겠다고 잉글랜드를 비웠다. 섭정인 숙부도 없어졌고, 머리도 굵어진 리처드 2세는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조차 숙부로부터 [[반면교사]]를 못했던 것인지 그의 첫 번째 친정은 최악이었다. 곤트의 존의 섭정 시절보다도 잉글랜드의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하였고, 결국 내전이 작게나마 벌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청원파'''[* 청원파의 목적이 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청원파는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리처드 2세 및 헨리의 막내 숙부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필두로 한 왕의 친척들이 대세였다. 왕권이 약화되면 왕과의 혈연이 권력 기반인 그들의 권위도 낮아질 테니 이들은 도리어 왕권이 크게 약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청원파는 왕이 방계 왕족을 못살게 구는 것을 견제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판 남이 [[권신]]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파벌이었다.]가 득세한 의회와의 사이는 매우 나빠졌다.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에서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실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이 둘을 중재시키며 내전을 종결시켰다. 이 일로 다시 존의 위세가 높아졌고 [[아키텐]] 공국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존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용히 충성파들의 세력을 단결시킨 리처드 2세가 청원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으며, 곤트의 존도 왕국의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일단 자신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목숨이 저당잡힌 신세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에 반하지 않고 조용히 섭정으로 지냈다. 심지어 리처드 2세가 자신의 막내 남동생인 우드스톡의 토마스를 살해하는 것도 지켜봤다. 숙부의 기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확인한 리처드 2세는 살아남은 청원파이자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추방하고, 존이 사망하자 헨리의 영지 상속을 막기 위해 랭커스터 영지마저 몰수했다. 이로써 리처드 2세가 숙부와 그의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왕권을 찾았으나 아직 불안하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곤트의 존이 부재했을 때 리처드 2세의 통치에 불만과 의심이 많았으며 숙청당한 청원파 잔당들은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 왕실의 영토 등지에서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왕권이 이렇게 불안한데도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 사이에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와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대세를 결정지었다. 그리하여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왕위에 올라 [[헨리 4세]]가 되었고 [[랭커스터 왕조]]를 열게 되었다(1399).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잔존세력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킨 탓에 헨리 4세는 이들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게 왕위 계승의 법칙에서 상당히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원래 리처드 2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는 당시에 7살짜리 어린이였던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 참고로 할아버지인 제3대 마치 백작의 이름도 에드먼드였고, 숙부의 이름도 에드먼드였다.]였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차남이었던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다.[* 이 사람도 오래는 못 살고 29세 때 요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인 필리파의 친손자였다. 필리파는 라이오넬이 18세 때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나이 차이다. 가장 큰 이유는 리처드 2세가 흑태자가 38세 때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리처드 2세가 후손없이 사망하면, 에드워드 3세의 큰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의 후손이 멸절되었으니, 차남인 라이오넬의 후손으로 왕위가 넘어갈 차례였다.[* 참고로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에드워드 3세의 (장성한 아들 중에) 3남인 곤트의 존의 장남이었다.] 그런데 이때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이도 어리고 자신에 비하면 한참 만만한 집안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왕이 되는 게 꼴보기 싫었는지,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르기 위해 더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을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왕위는 군주의 아들이 군주의 남자 형제보다 우선이며, 군주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가 상속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즉 흑태자 에드워드의 외동아들인 리처드 2세가 아들없이 죽으면, 흑태자 에드워드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이 왕위 계승자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라이오넬의 바로 아랫 동생인 곤트의 존이 후계이며, 곤트의 존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즉 여계 후손의 왕위 계승을 아예 부정해버렸다.[* 이론적으로 완전 부정은 아니나 사실상 부정이나 다름없다. 실제 이 규칙이 적용된 프랑스 왕실에서는 1,0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여왕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규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문화되어, 곤트의 존의 5남의 손녀의 아들인 헨리 튜더, 즉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이 왕위 계승의 법칙은 [[동양]]에서라면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서양에서는 꽤 생소했고,[* 당장 《[[살리카법]]》은 외손자의 왕위 계승은 인정한다.] 사람들의 반응은 "왕이 되고 싶어서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정도였다. 물론 실권자인 볼링브로크의 헨리 앞에서 그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불만이 크게 없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했다. 다행히도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이자 보호자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왕위 즉위에 찬성했고, 이 덕분에 잡음은 많았을 망정 직접적인 반대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를 정리한 후 헨리 4세는 죽고 아들 [[헨리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1413). 과감한 성격이었던 헨리 5세는 국내가 안정되자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캐바른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해 헨리 5세의 자손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조의 전성기를 연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 체결 후 2년 만인 1422년 8월에 전염병으로 급사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였다.[* 이때 '광인왕 [[샤를 6세]]도 10월에 잇따라 죽었지만 아들 [[샤를 7세]]가 조약을 깨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사실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자기보다 훨씬 일찍 죽을 것 같아서 맺은 조약이었는데.] 이후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 등이 등장한 프랑스군에 밀리기 시작해 결국 1453년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마지막 보루였던 [[보르도]]가 함락당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다.[* 다만 북부의 [[칼레]]는 남아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